차이의 통합을 통한 동시대성과의 조우

이지현의 페인팅 세계

이진명, 큐레이터

이지현이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등단한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작가는 국내외에서 참신한 주제와 대담한 필치로 주목을 받아왔고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에서 점진적으로 회화 수준을 상승시켜왔던 것이 커다란 매력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본질적으로 이지현은 회화의 다른 시도와 다른 영역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강한 믿음에서 작업을 시작했기에 우리에게 매력적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 차원의 예술의 원칙이나 출발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것은 바로 회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작가는 이 일차적이고도 거시적 물음에 시대성과 사회적 분위기, 인간에 대한 물음을 동시에 뒤섞는다.

서구 회화, 예를 들면, 프란시스코 고야의처형이나 카라바조의에케 호모(Ecce Homo)’는 시점이 하나로 닫혀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문체, 즉 스타일이 과거의 미적 선례들과 어떻게 차별화되는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또 이 차별화된 스타일을 뒤로하고 회화가 지니는 주제와 내용의 해석으로 정신이 집중되게 된다. 여기서 어떠한 해석이 종합된 다음에 비로소 회화가 자아내는 제 3의 분위기를 맛보면서 작가라는 인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 과정은 마치 프로파일링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스타일, 내용, 그리고 개인의 아이덴티티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거대한 밀고 당기기라는 게임과 사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투의 과정에서 지극한 지적, 감성적 만족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서구 회화의 이해 과정은 단일한 사유 패턴의 닫힌 세계라는 것이 그것의 통설적 약점이다. 단일 시점 안에서의 완벽성 구현 여부, 다양한 해석에 대한 고압적 분위기 등은 회화를 즐거움의 대상에서 오히려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일반 대중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낳곤 했다.

페인팅이라는 영역과 행위에 대한 이지현 작가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작가가 우리에게 최초로 제기한 문제는 다면 시점이다. 서로 이질적이며 도저히 아이덴티티가 양립될 수 없는 공간을 하나에 병치, 융합시킴으로써 앞서 말했던 양상의 문제들을 도출시키는 것이다. 첫째, 작가는 서로 완전히 다른 공간을 병립, 융합시킴으로써 의미의 도치를 확립한다. 그것은 시점의 환각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차별적 시간대의 무차별적 수용이라는 회화의 맛을 제공한다. 이는 꼴라쥬나 합성사진의 아우라가 갖는 느낌과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오일 페인트라는 하나의 물질과 작가의 붓질이 시간의 유영 속에 완성되면서 새로운 의미 차원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작품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을 보자. 작가가 2006년도에 완성한콜로세움+드레싱 테이블(Colosseum+Dressing Table)’이라는 작품 시리즈가 그것이다. 고대 로마와 현대의 부띠끄 이미지의 병립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단순한 미적 쾌감이나 이색적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콜로세움이라는 공간은 누천년 시간의 집적체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드레싱 테이블은 현대의 소비생활의 상징인 것도 자명하다. 콜로세움은 남성적이고 드레싱 테이블이 여성적인 것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같은 사회적 운영체계에 불과하다. 기원전 로마에서 17세기 스페인에서 대중은 축제와 유흥을 많이 개최하는 정치가를 좋은 정치가로 평가하고 반겼다. 현대에서는 개인 소유물이 자기 공간에 많이 쌓일수록 좋은 시대라고 평가한다. 이 둘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세계에 대한 실마리가 풀린다. 소유의 주권과 공적 공간의 병치는 도시와 사회를 개발한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 요건이며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임을 새삼스레 뇌리에 떠올릴 것도 없다. 인간 삶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파노라마처럼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작가의 소재인 카페, 도심의 거리, 미술관, 작가의 스튜디오, 창 너머의 공간들은 절대로 미적 형식을 도출시키기 위한 모티브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려는 작가의 모험이자 시간의 의미, 인간 삶을 읽으려는 시각적 사상(visual thought)에 다름 아니다. 시대가 바뀌고 제도가 진화한다고 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의 인간이나 마키아벨리의 시대의 인간, 그리고 현대라는 시대에도 인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대중과 엘리트 나눌 필요도 없이 그것은 동일한 생각의 패턴을 보여준다. 인간은지아비가 죽은 일보다도 자기 재산 잃은 일을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는 이탈리아의 속담처럼 욕망에 몸서리를 치다 몸져눕는 운명이다. 특히나 글로벌리즘의 시대, 문화가 트랜스되며 겹겹이 겹치며 정보가 융단자의 실들처럼 복합적으로 얽힌 지금에서야 예술가로서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무엇에 의지를 둘지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이처럼 모호한 시대도 애초에 없었다. 진정으로 불확정성의 시대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가치나 진리체계를 더 이상 순전히 수용할 수도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다만 몸서리쳐지는 욕심을 세상은 긍정하고 심지어 권장하기까지 하는 시대다. 이래서는 예술도 하나의 상업이자 돈줄의 선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역사상 최초의 직업자와 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는 그럴수록 본질 속으로 깊이 개입하려고 한다. 인간, 역사가 기록한 수 천 년의 모습을 통해서 전혀 변하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꿰뚫으려고 한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재미있는 분석을 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회와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사회가 있는데, 전자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기 발전을 지속시키려고 하고 후자는 물자를 교환하면서 자기 발전을 꾀한다고 했다. 전자는 영토중심 사회, 후자는 거점중심 사회인데, 로마제국이나 원제국이 전자의 대표격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이 베네치아 공화국이라고 한다. 현대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스템이 극단적으로 미분화된 사회일 것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끝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발전이라는 것이 있는 사회이다. 현재로써 정의 내리기 힘든 글로벌리즘의 속성은 바로 인간을 이동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조장하는 성격에 있다. 그런데 이 이동에는 교환이라는 것이 반드시 수반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기 것을 다른 것과 교환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 교환의 농도와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속성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그리려는 주권의 공간과 공적 공간의 강한 콘트라스트는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낸 수작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본 2008년까지의 작가의 그림이었다. 2003년의 발랄했던 데뷔 개인전부터 2005년 갤러리 현대의 감각적 확산이 엿보였던 전시, 그리고 웅혼했던 스토리까지 추가되었던 2008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전시회가 아직도 회자되곤 한다.

확실히 작가의 필치나 색채, 그리고 기법은 한국에서 연마된 것이다. 예술과 미학의 기본은 인종과 국적, 계층과 성별을 떠나서 통용되는 심미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안도 히로시케(Ando Hiroshige)와 일본인이 보는 그것, 나이지리아인이 보는 심사정과 우리가 보는 그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확연히 다른 감각과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의 무한적 교차야말로 현대미술이 진화해가는 추진력의 본령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 뉴욕에 체류하면서 작업한다. 그런데 타고난 감각과 길러진 세련됨을 동시에 구유하는 세계도처의 작가들이 몰려있는 가운데 예술의 최종 소비지 뉴욕에서 이지현 작가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도를 진행했다. 이전보다 오히려 개인적 스타일에 더욱 침잠되어 천착하는 태도가 감지된다. 이전의 회화가 감각을 외부로 무한히 확산시키려는 힘의 시도였다면 현재는 외부세계보다도 자아의 내면으로 응집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왜일까? 그리고 물감을 두텁게 올려가면서 탄탄한 구조를 구축했던 후지혜(後智慧)의 과거와 달리 완성될 구조자체를 미리 예감하면서 붓질의 유희와 물감의 양적 발산을 점진적으로 자제한다. 형태의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의 왜곡의 변주곡이었던 과거에 비해 대상의 본질을 내면에 간직한 후 일시에 화면으로 투사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일까? 작가는 뉴욕에서 서구인 큐레이터나 서구인 작가, 미술관계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했을 것이다. 작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세상을 알아가는 것 같다. 에너지 넘쳤던 정렬의 작업보다도 우아한 차분함으로 차츰 경도해가는 예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 신작 판타스마에 대해서 분석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2012년부터 작가가 새로 진행해온 신작 시리즈 판타스마(Fantasma)’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판타스마는 스페인어로 유령이나 환영, 혹은 가상, 실존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판타스마라는 작업 명칭은 작가가 철저하게 준비하고 고민해서 명명한 제목인 것 같다. 무언가 정의할 수 없는 중간지대를 의미하는 데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마치 작가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얻은 느낌을 솔직히 발산시킨 시원한 기분이 든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작업 시리즈는 유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드로잉도 아니다. 작가의 최초 초기작과 무르익어가는 시점의 시리즈의 장점을 혼합시킨 기법인데, 어째서 이러한 작업을 진행시켰는지 되묻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첫째, 공간을 이동하면서 사는 작가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두 문화권을 이동하면서 느낀 느낌과 감수성은 우리 일반인과 다르게 매우 섬세하고 첨예할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는 고정되지 않은 중간지대에서(inbetween)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중간지대의 삶은 우선 문화와 문화 사이의 이중적 체험으로서 의미가 있다. 둘째, 작가는 작가의 생활과 어머니의 생활 사이에서 무수한 진동의 체험을 한다. 셋째, 한국에서 자리잡은 작가와 뉴욕에서 신인인 작가 사이의 사회적 관계상에 관한 중간지대를 체험한다. 넷째, 더 깊이 있게 바라보자면 이 시리즈는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작가의 회화세계에서 기존의 페인팅 역량을 스스로 초월해야만 하는 자기 소명의식의 발로인 것만 같다. 따라서 최초의 드로잉 작업과 완성형의 회화형식을 섞어버림으로써 자기 형식을 해체시키는 실험에 몰입한 것일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신작을 보는 즐거움이 배가된다.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인 비트위너(inbetweener)’라는 작업자가 있다. 원작 만화의 회화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중간에 여러 매의 연결 컷을 삽입시키는 작업자를 가리킨다. 나는 작가가 두 가지 이질적 문화의 보이지 않는 차이를 하나로 연결시켜 살아 생동하는 느낌을 한껏 발휘시키는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실재와 가상 사이의 깊은 골을 판타스마라는 형식을 통해 메우는 작업자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가는 분명히 존재(being)보다도 생성(becoming)의 중대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진행시킨 것이다.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의 말대로 세상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만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기성과 기득이 현재를 강하게 보전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자기 옹호의 변론이다. 미학과 정치학, 사회학이 제공하는 온갖 종류의 가치론은 제도의 상층부를 점유하는 사람들의 자기 보호책이라고 보면 무탈하다.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이다. 반면에 이 이데올로기를 깨기 위해서 자기의 새로운 대안을 설계하는 사람들의 체계적인 시도를 유토피아라고 한다. 이 유토피아가 정치적 힘을 얻었을 때 유토피아는 없어지고 새로운 이름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일치일난(一致一亂)의 격동을 우리는 역사라고 배웠다. 미술의 역사 또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일치일난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성과 아방가르드는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말과 바꾸어도 무방하다. 작가는 한국의 이데올로기 생산자에서 현재 뉴욕의 유토피아 생산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가 태어나서 자란 현지의 토양과 문화적 맥락을 더욱 반성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작가도 여기에 부응해서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 회화를 구축하는 실존적 이유를 절실하게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에너지의 발산이 아니라 스스로를 조응하는 태도, 동양적 정서의 배가, 자기와 주변환경에 대한 고찰 등이 2012년과 2013년 작품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아시아 작가, 그것도 아시아 여성 작가라면 더욱 밀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울 수만은 없다. 이때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나는 요즘 작가가 새로운 메커니즘과 인생관을 확실히 만들어가고 있음을 선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자기를 깨달아가는 영원한 과정을 인생이라고 말할 때 작가는 끝까지 인생으로부터 체현된 작품을 하는 작가로 남길 진정으로 기대한다.